|  | | ↑↑ ▲경주 김동리 생가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경주는 다시 행복하다. 나라의 문학을 시와 소설 모두 석권한 사람들이 있어 그렇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에서조차 김동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졸고 학위 논문의 제목(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양상연구)을 얻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본명은 시종(始鍾)으로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로 노산한 탓에 젖이 모자랐다. 형수의 품속에서 암죽으로 키워진다. 아버지는 주정뱅이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패에 못 이겨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김동리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 엄청난 독서량을 소화해 낸 것은 한학자이자 철학자인 큰형 김범부의 영향이 크다.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된다.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경남 사천)와 해인사(경남 합천) 등에서 은거한다. 이미 큰형 김범부가 다솔사에서 스님들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또한 선문(禪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 해인사에 머물며 숯 굴을 소재로 한 「산화」를 써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7년 김동리는 드디어 자신의 문학관을 작품으로 구현한 첫 창작집 「무녀도」를 펴낸다. 그 소설에서는 무당 모화와 아들 욱이, 그리고 배다른 딸 낭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족과 종교의 갈등을 그려낸 소설이다.
「무녀도」는 김동리의 실제 유년 시절의 체험을 반영한다. 김동리의 아버지는 술에 젖어 세월을 보낸 이로서 주사가 심했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기독교에 의지하게 되는데, 부부싸움 끝에 교우인 지동댁으로 피신하는 일이 잦았다. 지동댁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는 “귀신 달아난다!”고 고함을 치고, 지동댁은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하며 더욱 소리를 높이곤 한다. 이것이 「무녀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순수 문학을 옹호하며 “제3기 휴머니즘”이라는 다양한 용어가 나오는 문학론을 체계화해 평론집 『문학과 인간』을 발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솟는 창작욕을 과시하다 1990년 7월 30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랜 투병 끝에 1995년 숨을 거두며, 경주달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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