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아름다운 불국사에 다보탑이 있는 고향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경사스러운 고을(慶州) 형산강, 여러 지천(支川) 중 남천 시래천변이 안태본이다.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에서 부산 쪽 신호기가 있는 마을에 고고성을 울리고 열 번째로 태어났다. 6ㆍ25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음력 사월 열이틀 날에 말이다. 그 곳 이야기를 시작한지 꼭 108번째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의 왕성한 철학(?)으로 서당에서 천자문을 폈다. 한 달간 250(지킬 守, 1/4)자 배우고 국민학교로 갔다. 1957년 4월 1일이 일생 통과의례 중 최초의 입학식이다. 그 후 초교는 1963년 2월 9일에 졸업하고, 상장과 상품을 한 아름 안고 왔지만 칭찬 못 들었다. 신학문 끝으로 다시 동네 서당으로 갔다.
동몽선습, 계몽편, 명심보감, 소학, 통감이라는 생소한 한문책을 배웠다. 중학교는 어련히 “부모가 가지 말라”면 안가도 되는 줄 알았다. 꼴머슴과 함께 똑같이 나무하고, 소 풀 베고 농사지었다. 농사견습생이다.
마을문고에서 「농원」과 「학원」잡지 보면서 세상의 정보를 얻었다. 책속 광고에는 학교가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다고 광고하는 “제일강의록”, “연합강의록” 중에 “연합강의록”을 신청하여 혼자 공부하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 강의록으로 신학문을 배우니까 콩 볶는 것보다 더 재미가 났다.
꼬맹이가 신학문에 빠져 고등학교로 갔다. 어찌 역사를 배우면서 신라를 모를 소냐? 게다가 권 교감선생님의 우리나라 역사특강 한 시간을 듣고 역사에 푹 빠졌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고3 때 이미 군 신체검사를 하였다. 고교졸업 이듬해 3월 12일자로 군 입영영장이 나왔다. 나는 교육대학을 선택하였다.
대학 1학년 때까지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못하였다. 시골 여상유치에 앞장서서 뜻을 이루었다. 마석산 등산가면서 보는 현재 “경주여자정보고등학교”를 보아도 가슴 참 뿌듯하다. 또 글로 인하여 고향 찾으니 너무 좋다.
고향에 대한 글을 썼다. 형산강에 대한 글이다. 바로 이 한 권(「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 「2023 경주문화 29권」- 10편 수록. pp.22~37)의 글이다. 그 곳은 내가 태어난 남천 시래천변이다. 지금도 눈 감으면 잊지 못하는 고향이다. 이 글은 108편으로 마친다. 마치 108염주로 소원 빌듯 썼다.
A4용지 한 장의 짧은 글이다. 누구는 욕하고, 누구는 괜찮다고 자기 카페에 담아가고, 그래도 108편을 썼다. 경주「황성신문(사장 최남억)」에서는 내 글을 싣기로 하여 주일마다 글이 나왔다. 이 글에는 삽화(揷畵)로 삽화(揷話)를 더하였다.
이제까지 「또 천 년의 달빛 흐르는 형산강」을 사랑하여 주어 고맙습니다.
(※ 다음 주부터 엽서수필-「보랏빛 엽서수필」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수필가 이영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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