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지게목발 두들기다 대구 범어네거리 산다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어디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못 다한 것이 한두 가지 이겠는가? 어려서부터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도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그림 그리면 “환쟁이 될라 카나?”라고 하는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 그저 나 혼자 좋아서 흙바닥이나 종이에 그림 그려 보는 것뿐이다.
중학교 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버지 개똥(?)철학으로 초교 졸업하고 학교공부는 끝이 났다. 낮에 일하고 밤이면 무슨 희망이 보인다고 꼬부랑글자 쓰고, 영어 단어 외우며 늘 나 혼자 독습(獨習)하고 만족하였다. 2년 동안 그렇게 하여 중학교과정을 혼자 섭렵하였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하였다. 더 많이 배우는 신학문이 꼭 필요하였다. 아버지 몰래 4km 떨어진 큰누나 집으로 출사표 썼다. 중1학년을 가르치며 가정교사로 돈 벌어가면서 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석 달 후 교복차려 입고, 모자 쓰며 책 가득 넣은 가방 들고 집으로 유유히 갔다가 아버지에게 답삭 붙잡혀 책가방을 빼앗겨 잿더미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어머니 황급히 재 털어가며 가방 챙겨주면서 하는 말씀이 “네가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거든 다시는 집에 오지마라!” 그 후 1년 지난 후 아버지 앞에 끓어 앉아 토, 일요일 집안일을 모두 하는 조건으로 귀가 하게 되었다.
왜 하고 싶은 공부하면 안 되는지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버지 열아홉 살에 조부 돌아갔다. 사남매 치송도 못했는데 당신이 직접 가문을 다시 일으키었다. 그러나 이천 석하던 아버지 재종 집에 “마름”하였다. 그 때 보았던 것이 일제침략기시대 중학교(5년제) 나와 가산을 일시에 탕진하는 것 보고 신학문은 나쁜 것이라는 철학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으로 신학문을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나에게는 논 두 마지기가 유일 유산으로 전부이다. 서당 다니면서 축문, 지방, 제문, 혼서 등 쓸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장가가서 아들딸 많이 낳아 가문 이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1 머릿속에서는 전근대 농경시대 관습이었다. 아버지는 목수이었기에 초가삼간은 퍼떡 지어 줄 수가 있다. 부모 모시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내가 살아갈 21세기에서는 그것이 분명 아닌데 말이다.
그럭저럭 고생했어도 돈 벌어 가면서 내 공부한 것도 천만다행이다. 연금수급자요, 좋아하는 글 실컷 써보는 수필가가 되었으니 반분(?)은 풀리었다. 이제 그냥 살아간다. “말 타면 경마 잡힌다.”고 사람의 욕심은 자꾸 생긴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날 일로만 알았다. 그러나 못 다한 욕심 채웠다. 나를 깨우쳤다.
21세기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쏟아진다. 아날로그로 살아가기 참 어려운 시대다. 지나 온 옛날이 추억으로 한 켜씩 접히어 있다. 그 켜 하나씩 풀어가며 그래도 못 다한 욕심을 통쾌히 헤집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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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 차성(車城)인 이수상(李壽祥, 1899~1973). 아버지는 근세조선 고종 광무(光武) 3년에 출생한 왕조시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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