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송계댁-당년 54세(아버지 회갑연때 촬영)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엄마는 그렇게 부잣집 셋째 딸로 곱게 자라 꽃다운 열아홉에 일곱 살 차이나는 신랑에게 가마 타고 시집 왔다. 걸어서는 무척 먼 거리이었으나 요즘 차타고 고작 10분이면 되는 거리이다. 시집 온 달포부터 택호지어 받았다. 경북 경주군 구정리 소정 냇가 소나무가 자란 곳이라서 “솔 송(松)”자에 “시내 계(谿)”자를 합자하여 “송계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경상도 사람들이 복모음 부르기에 그리도 인색하였는지 택호를 올바르게 불러 주지 아니하였다. 들리는 소리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생개땍〕으로 들리었다.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 자구배운 후부터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증조는 두 째 집 건너에서 고조의 양자로 들어왔다. 조부 대에는 독자였지만 아버지 대에 사남매를 두었다. 아버지는 아들 다섯, 딸 다섯을 얻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는 데도 어찌하여 그리 많은 자식을 잘 얻었을까? 엄마의 노고다.
엄마 열아홉에 시집 와서 열여덟 해 지나 큰 아들 장가보내어 스무 살 큰며느리를 얻었다. 간당 서른일곱에 시어머니가 되었다. 시어머니와 큰 며느리 17년차다. 그 후 차례대로 아들 ㆍ 딸 장가, 시집보내었다. 당신 돌아가시고 꼭 삼년 만에 엄마는 그렇게 쉽게 아버지 따라 북망산으로 가시었다.
앞선 시대에서는 여성은 시집와서 벙어리로 삼년, 또 귀머거리로 삼년 살아야 하였다. 엄마는 속 좁고 성질 괴팍한 신랑 만나 좀 채 정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송계댁 무던하고, 복 받아 많은 자식 얻고 살림이 절로 불어나서 부농 되었다. 한때 머슴 셋 데리고, 일흔 마지기 농사지으며 소를 열한 마리나 먹이었다. 아버지 목수로 집 열두 채 지었다. 네 채에만 우리들이 살고 여덟 채는 세 내었다.
밭 4천 평, 산 3정보를 가진 자칭 소농 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등 자녀 많이 낳아 놓고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둘째 며느리였던 엄마는 큰집 제사를 모두 모셔와 일 년 열두 번 지냈다. 자신 자녀와 큰집, 작은집의 조카, 질녀 모두 스물하나를 치송하였다. 집안대소사는 모두 치러내었다.
무명베, 명주는 물론 삼베까지 일일이 엄마 손으로 길쌈하여 짰다. 정월 대보름에 봄낳이부터 철따라 옷 지어 머슴들 함박웃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들판 가운데 살았기에 길손, 과객, 무전여행 대학생, 지나는 배고픈 사람 등 요기 챙겨주기도 바빴다. 농사철 들밥에서는 길손 들 여럿사람 모두 먹이어 보냈다. 송계댁 마침내 돌아가시니 부군과 쌍분하고, 시래동 밀개산 유택에 석비 세웠다.
여든의長壽와열男妹의榮潤함이하늘주신것으로어찌偶然한일이오며
車城李門敦宗敦睦佛國寺에서發論됨이人意로다한精誠公의忠孝誠符書로다.
爾後密開山巖과水의靈氣받아松明居士松谿堂夫人의넋을千秋에누리오리다.-泳伯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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