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주의 우물- 재매정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인간이면 물을 마시고 산다. 병아리는 용케도 전이 낮은 접시의 물을 콕~ 한 번 찍어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본다. 산 노루는 간밤에 어디서 잤는지 모르지만 산속 깊은 옹달샘을 찾아와서 세수는커녕 물만 먹고 간다.
경주에는 샘이 많다. 그것은 신라시조가 태어난 “나정(蘿井)”이요, 김유신장군이 가노를 시켜 물마시고서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한“재매정(財買井)”이 있다. 또한 쪽샘은 황오동 반고정샘, 백율사의 우물과 함께 경주 3대 우물로도 유명하다. 현재까지도 이 쪽샘마을에는 200여개의 우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우물 많기로도 유명한 경주의 마을이다.
내가 살았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작은 우물이 여럿 있다. 처음 살았던 마을은 철길 밑에 학자수(물포구나무)가 있는 우물이다. 두 번째 집에서는 작은 우물이어서 날이 가물면 자주 마르던 곳이다. 세 번째 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퍼 올려 마시고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 유명한 우물로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네 번째 이사한 후 우물 파는 일이 큰일이다. 도랑 곁에 파기 시작하였다. 어린 날 우물 파는 것 보고 겁내 하였다. 작은 공간 속에 자꾸 파내려가면서 위에서 돌을 내려 괴이고, 우물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쌓아야하기 때문이다. 한참 우물 파내려 갔는데 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몸피가 작으니까 파고 있는 그 곳에 들어가 작업하라는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어길 수 있겠는가?
바지 걷어 올리고 셔츠바람으로 내려갔다. 도르래에 양동이 매달아 흙을 퍼 담고 줄 당기면 신호로 그 양동이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물 속에는 나 혼자뿐이다. 우물 속에서 하늘 치어다보면 꼭 동전크기만하다. 다시 양동이가 내려오기까지 너무 답답하다.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염려로 더욱 무서웠다. 그렇게 우물이 만들어졌다. 밖으로 올라와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 살았다. 난 죽을 번하였다.
시골 마지막 우물은 나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 팠기에 오랫동안 애착이 가던 우물이다. 여름에는 우물 속에다 줄 내려 여러 가지를 묶어둔다. 아버지 새참 동동주 주전자를 매달아 두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 자연냉장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어머니가 하는 일 중에 큰일은 된장 담그기이다. 우물물을 양동이에 퍼 담아 무지개에 걸쳐 짊어지고 날랐다. 사람 사는 데는 샘물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집 우물이 작았다. 그런 우물을 “옹 우물”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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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정(蘿井) : 사적 제245호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다.
*2. 재매정(財買井) : 사적 제246호 경주시 교동에 있다. 김유신장군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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