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하루 종일 베틀에 앉아 있는 어머니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나의 어머니 이름은 남자이름처럼 들린다. 경주최씨 두봉(崔斗鳳)이다. 근세조선 고종 광무10년(1906)에 태어났다. 여성으로서 불행한 마지막 왕조시대 분이다. 4년 뒤에 나라 잃어 일제강점기*시대를 맞이하였다. 왕조시대에서 전근대 식민지시대로 거치며 살아온 불운의 여성이다. 여성으로 고달프고, 대우받지 못한 삶이다.
나를 낳은 1949년은 6ㆍ25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이다. 삶에서 전쟁 겪는다는 것은 특히 여성으로서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를 낳아주었다. “부모은중경”을 펼쳤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다섯 째 막내누나가 호부 세 살로 호열자 앓다 갔다. 그 자리를 메우려고 내가 태어났다. 마흔넷에 마마 겪으며 차마 사람의 얼굴이 아니면서도 출산하였다. 이 어찌 혹독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마흔넷에 어려운 삶에서 곰보가 되었다.
열아홉에 일곱 살 많은 노총각 아버지 만나 서른여덟에 당신의 큰며느리를 보았으니 이 또한 대략난감 하였다. 아버지 괴팍한 성격에 제때 일이 잘 안되면 어머니만 몰아붙였다. 많은 자식에 집안 대소사를 큰집 제치고 일 년 열두 번 제사까지 모셨다. 내가 초교 졸업하고 서당 다닐 때 겨우 종백씨 집으로 제사를 천이하여 갔다. 둘째 며느리인 어머니는 그 동안 큰집 역할을 톡톡히 맡아하였다.
남들은 농촌 부자라고 하였으나 모든 것을 아껴야 하였다. 남의 식구인 머슴 셋의 철따라 옷 준비를 하였다. 베틀에 앉아 베 짜서 옷까지 바느질하여 만들었다. 그 수고로움으로 어머니의 몫을 모두 해내었던 것이다. 우리 집 멈들은 좋아하였다.
첫째 딸 순흥안씨 대종손 집으로, 둘째 딸 경주최씨 해병대 부사관(하사관)출신 부산에, 셋째 딸 달성서씨 초등학교 기능직으로 울산에, 넷째 딸 함창김씨 세무공무원에게 결혼 일 주일 만에 사표 던지고 장사하는 집 울산으로 보내었다. 많은 딸을 선보고, 성혼시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희비쌍곡선을 겪었겠는가?
늦은 세월에는 편히 쉬려고 하였으나 열 자식 출산에 신경통으로 늘 약 봉투를 만나고 살았다. 아버지 돌아가고 일 년 만에 내가 결혼하니 그렇게 좋아 하였다. 하숙하다 방 얻어 신접살이 준비하려던 먼 곳 바닷가까지 찾아와서 함께하여 주었다. 결혼하여 첫 손자 안겨 드리고, 둘째 손자 낳기 전에 아버지 돌아 간지 꼭 삼년 만에 가셨다. 부모 쌍분에 정성들이어 석비(石碑)하여 드렸다.
천 년 유택 만들어 요즘 폐역 된 불국사기차역 역사(驛舍)를 내려다본다. 송계당 경주최씨 휘두봉 여사는 고향을 지킨다. 새삼스러이 산에서 아들, 며느리 거느리고 유택을 지킨다. 곁에 남편 두고, 위에 시어른 유택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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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혹은 일본 통치시대 :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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