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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력원자력의 ‘홍보 현수막’ 사태는 문구 실수나 홍보 실패가 아니다. 지역 주민을 ‘수혜의 대상’으로 보는 왜곡된 인식, 그리고 공공기관 거버넌스의 구멍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다. 논란이 커진 뒤 국무총리의 공개 지적 다음 날에야 사과문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번 해명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론이 생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수도 먹었잖아”라는 문구는 공공기관의 지원을 ‘베풀어 준 은혜’로 호도했고, 시민을 파트너가 아닌 피대상으로 격하했다. 공기업이 지역사회와 맺어야 할 관계의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한수원은 “지원사업을 알리려다 표현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표현기술이 아니라 인식구조다. 내부 어디에서도 ‘이 문구가 모욕적일 수 있다’는 경고가 울리지 않았고, 보고·검증 절차도 작동하지 않았다. 사후 해명에서 “실무자가 보고 없이 실행했다”는 취지의 설명이 나왔지만, 그 말대로라면 조직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실무자의 일탈이 가능하도록 만든 허술한 절차, 위험을 감지해 제동을 걸 장치가 없었던 조직 문화 자체가 문제다. 공공기관은 ‘누가 했느냐’보다 ‘왜 시스템이 막지 못했느냐’를 먼저 답해야 한다.
국무총리실 감찰과 자체 감사 예고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감찰과 징계만으로는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첫째, 조사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현수막 기획·결정·제작·게시·철거에 이르는 의사결정 라인과 타임라인, 승인 권한, 위험 신호가 묵살된 경로를 낱낱이 기록해 시민에게 보고하라. 둘째, ‘시민 존중 원칙’을 경영 전반의 최상위 규범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지원사업 커뮤니케이션에서 ‘시혜·공치사·대가 요구’로 해석될 모든 표현을 금지하고, 성인지·지역감수성·사회적 약자 관점까지 포함하는 윤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라. 셋째, 사전 검증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외부 시민패널, 지역 언론, 학교·단체 등과 함께하는 상설 검토위원회를 두고, 대외 메시지는 법무·감사·브랜드·지역협력 부서의 교차 심사를 의무화하라. 넷째, 전 직원 교육을 일회성 특강이 아니라 평가가 수반되는 연중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라. 현장의 하청·협력업체 종사자까지 포함해 ‘존중의 언어’와 ‘책임의 절차’를 조직의 공통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 회복이다. “사과한다, 재발 방지하겠다”는 상투적 문장으로는 부족하다. 한수원은 경주 시민에게 구체적 약속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공기업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공공의 돈으로 하는 일은 ‘은혜’가 아니라 ‘책무’다. 지원은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 실현을 돕는 과정이며, 홍보는 공치사가 아니라 책임성과 투명성을 설명하는 도구여야 한다. 지역사회와의 신뢰는 공문 한 장, 현수막 몇 장으로 쌓이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점검, 실패의 기록을 숨기지 않는 투명성, 그리고 존중의 언어가 매일같이 반복될 때 비로소 회복된다.
사과는 출발선일 뿐이다. 한수원이 말한 대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면, 초심의 내용을 시민이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로 남겨야 한다. 이번 사건을 ‘홍보 참사’로만 처리한다면 같은 오류는 형태만 바꿔 다시 나타날 것이다. 공기업이 시민에게 진 빚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갚아야 한다. 이번이야말로 한수원이 ‘지역과 함께 가는 기업’인지 스스로 증명할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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