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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그러나 한지원(閑地原)은 고려(高麗) 현종(顯宗) 이후에 생긴 지명(地名)으로 경작(耕作)하지 않고 오래도록 묵힌 토지(土地)를 뜻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의 한지(漢只)와는 사뭇 달라서 진평왕릉(眞平王陵)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가리키는 곳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主張)하기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금금강산백률사지북산야)라는 주(主)를 근거(根據)로 하여 한 지부(漢祗部)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그 주변지역(周邊地域)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推定)하는 견해(見解)도 있다. 그리하여 진평왕릉(眞平王陵)은 동천동 80번지에 있는 제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 일 것이라고 추정(推定)된다고 하였다.(강인구, 2000, 『고분연구古墳硏究』, 학연문화사學緣文化社.)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侯薛聰墓)는 보문동(普門洞) 경로당 옆인 경주시 보문동 423번지에 있다.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指定)되었다.
원효대사(元曉大師)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 경덕왕(新羅景德王) 때의 대학자(大學者)이며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新羅) 3대 문장가(文章家)로 신라(新羅) 10현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총지(聰智)이고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 추측(推測)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설총(薛聰)은 경사(經史)에 박학(博學)하였고 이두(吏讀)를 정리하여 향찰(鄕札)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며 화왕계(花王戒)라는 단편 산문(散文)을 지었는데 왕은 아부(阿附)하는 신하(臣下)들보다 정직(正直)하게 임금께 고하는 신하(臣下)의 말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뜻을 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당시 신문왕(神文王)에게 충언(忠言)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설총(薛聰)을 경주 설 씨(慶州薛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남촌(南村), 강시이, 봉각단, 양지말{이촌(李村)}, 곡각단, 능각단, 숫머리 등의 자연부락과 금댕이, 보문들 등의 들판과 서당골, 절골 등의 골짜기와 보문고개, 천곡재, 산성재 등의 고개와 보(洑)인 한보, 그리고 야산인 장군배이 등이 있다.
남촌(南村) 마을은 보문동 53-4번지의 보문 경로당(普門敬老堂)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形成)되어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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