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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 황성신문 | 1687년인 조선 숙종(朝鮮肅宗)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1693년 숙종(肅宗) 1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우암집이라는 저서(著書)를 남긴 영양남씨(英陽南氏) 우암 남구명(南九明)의 손자 남용만(南龍萬)이라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가 이주해 와서 자손대대(子孫代代)로 거주(居住)하고 있다고 하여 남씨(南氏)마을이라고도 하며 보문동(普門洞)에서 큰 마을이어서 큰 말이라고도 한다.
큰 마을 동쪽산 기슭에는 봉화(烽火) 각단, 또는 봉각단이 있는데 이는 봉화(烽火)를 올리던 보문동 산 51-1번지 일대(一帶)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했다고 한다.
산 51-1번지 일대(一帶)를 흰등산이라고도 하며 해발 268,7m로 명활산(明活山) 인근에서는 제일 높다. 흰등산 동북쪽 보문동 산 5번지 산마루 일대(一帶)를 천군동(千軍洞) 청단마을로 넘어간다고 하여 천곡잿만디이 또는 천고개라고 하고 산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천곡(天谷)이라 한다. 큰 마을 서쪽에는 ‘만냥판’이나 되는 넓고 큰 구덩이가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흘러넘쳤다고 하여 ‘만냥구디이들’이라 했다고 하며 ‘만냥구디이들’ 서쪽에 샘배기들은 샘이 있는 들이였다. 이샘의 주위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새미라고도 했다. 큰 마을 동 남쪽인 보문동 451-1번지 일대(一帶)를 옛날에 서당(書堂)이 있었다고 하여 서당(書堂)골이라고 하며 그 앞의 보문동 830번지는 유지로 서당(書堂)골 못으로 산 밑에 있다고 하여 산저제(山底堤)라고도 한다.
양지말{이촌(李村마을)}은 보문동 336-1번지 일대(一帶)인데 계미년(癸未年), 1883년인 고종(高宗) 20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성균관 제주(成均館 祭主)를 역임한 정헌공(定軒公) 이종상(李鐘祥)의 증조부인 이돈항(李敦恒)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 1720년경인 조선시대(朝鮮時代)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기간 1720년~1724년) 때 보문양지(普門陽地) 편에 마을을 일구어서 살고 있다 하여 이씨(李氏) 각단이라고도 한다. 보문동 599-1번지에 보문정사(普門精舍)가 있는데 정헌공(定軒公) 이종상(李鐘祥)을 봉향(奉享)하는 1985년에 지은 재실(齋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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