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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빈 들녘
보랏빛 엽서수필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5년 11월 21일(금) 14:43

↑↑ 텅 빈 들녁이 예술이다
ⓒ 황성신문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황성신문
철 따라 곡식들이 자라다가 잘 영글었다는 소식에 주인들이 모두 수거하고 남은 것은 빈 들녘뿐이다. 채소밭에는 배추를 심어 키우다가 쓸모 있는 배추는 모두 뽑히어 갔고, 흔적으로 숭숭 구멍만 남기고 있다. 가치 없는 배추는 버려졌다. 그나마 시들어 말라져 하얗게 하늘거렸다. 논 벌에서는 더 이상 쓸모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래도 겨울 동안 물 잡아 둔 논에서는 작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살얼음 밑으로 살아 있고, 위는 하얗게 덮여 있는 빈 들녘뿐이다.

채소밭에는 저들의 겨울 생명을 맡고 있던 채소들이 자리를 지켜주어서 덜 삭막하게 초록빛 들녘을 겨우 지키고 있다. 밤새 내린 서리로 흔히 사람들은 싱싱한 보약 같은 채소를 맛나게도 먹게 된다.

논 벌에서는 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쓸모없는 것처럼 아무 곡식도 자라지 않는다. 겨우 일부분 보리를 심어 두어 녹색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모진 추운 바람 속에서도 보리는 그 강건한 청춘으로 빈 들녘을 지키고 있다. 서릿발 위에서도 마치 꿋꿋한 사람 마냥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한다. 가을걷이 끝나고 겨우내 보리밭으로 철새인 갈까마귀 떼들이 찾아와 검은색으로 들판을 물들이고 있다. 아마도 살기 좋고, 꽤 맛있는 먹잇감이 있어서 그렇게 철새는 해마다 우리나라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 요즘 시절에 울산, 경주가 특히 그러하다.

들녘 사이사이에 도랑 가에는 실핏줄처럼 물을 흘려보낸다. 얼지 않을 만큼 물이 흐르면 졸졸 흐르는 물은 희한한 힘에도 얼음장 밑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다. 길을 가다 추워 물 흐르는 도랑 가에 내려서서 잠시 바람맞이 피하여 쉰다. 맞바람에 살 에이듯 아파 와서 잠시 바람을 비켜선 것이다. 높은 도랑둑으로 올라서면 저 멀리 북편에서 세찬 찬바람이 거침없이 들녘에 불어닥쳐 더욱 황량한 벌판을 연출한다. 이 북풍이 언제 사라지고 따뜻한 봄날이 와서 너른 들녘에 그 느낌을 받을 것인가? 빈 들녘에 외롭게 거닌다. 아무도 없는 빈 들녘을 만난다.

아무도 없는 들녘에 나는 두 팔 벌리고, 서서 다가오는 북풍의 찬 바람을 막아 버틴다. 난 이 세상을 결코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맹세하였고, 작은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더욱 강철 같은 의지로 내보이고 핏발 서릴 만치 맞설 것이다.

새삼 아무도 없는 들녘에 버티고 서서 살아갈 나머지 세월을 부둥켜안는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온통 떠안았다. 달이 뜨면 뜨는 달을 보고, 해가 뜨면 뜨는 해를 안고서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적극적 사고를 들쳐 업었다.

아무것도 없이 발가벗고 태어나 옷 한 벌 얻어 입었다. 이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그렇게 광영(光榮) 찾으려고 헤엄쳤고, 헛발질을 수도 없이 해댔다. 그래도 역시 빈 들녘이다.

황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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