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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 황성신문 | 조선후기(朝鮮後期) 경주군 내동면(內東面)에 속한 지역(地域)으로 구황리(九黃里), 구황룡리(九黃龍里) 또는 구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統合)과 폐합(廢合) 시에 사리(沙里)의 일부를 통합(統合)하여 구황리(九黃里)로 하였으며 1955년 경주읍에서 경주시로 승격되자 구황동(九黃洞)이 되었다. 구황동(九黃洞)은 법정동이고 1998년부터 행정동으로는 월성동(月城洞)의 관할(管轄)이다. 구황(九黃)은 신라 진흥왕(新羅眞興王)이 궁궐(宮闕)을 지으려고 하자 아홉 마리의 용(龍)이 승천(昇天)해서 절을 지었다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1238년인 고려 23대 고종 25년에 몽고(蒙古)의 침략으로 불에 타 버려서 폐사지(廢寺址)가 되었는데 고려말 경에 문신(文臣)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했고 고려가 멸망(滅亡)하고 조선이 건국(建國)되어서 만수산(萬壽山)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도(忠道)를 지켜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야은 길재(冶隱 吉再), 농은 민안부(陶隱 閔安富)와 더불어 육은(六隱)으로 일컬어졌으며 호(號)가 수은(樹隱)이며 경주김씨(慶州金氏) 충한(沖漢)의 손자 김요(金搖)라는 사람이 황룡사지(皇龍寺址) 터를 개척(開拓)하여 마을을 일구었다. 그러다가 1975년 경주개발계획(慶州開發計劃)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를 발굴했는데 이때 황룡사지(皇龍寺址) 내에 있던 모든 마을을 철거(撤去)했으며 구황동 857번지 일대(一帶)만 제외(除外)되어 남아 있다.
구황룡(九黃龍)의 동쪽에 고래소라는 늪이 있었고 이 일대(一帶)를 고로소들이라고 했다. 남쪽에는 평소(平素)에 항상 흉작(凶作)이었는데 논의 주인(主人)이 쉰 살이 되던 해에 풍년(豐年)이 들었다고 하는 쉰디기논과 진영(鎭營)의 소유인 영답(營畓)과 논에서 난 소득(所得)으로 어사(御史)를 접대(接待)했다는 어사배미도 있었다. 구황동 708번지와 인왕동 23-2번지 일대(一帶)는 홍수(洪水)가 나면 안압지(雁鴨池)의 물이 넘쳐흘러 잉어를 많이 잡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잉어배미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황룡사지(皇龍寺址)는 사적 6호로 구황동 772번지 일대(一帶)인데 동편에서 서편까지의 담장의 길이가 288m이고 남에서 북편으로의 담장의 길이는 281m나 된다고 하여 전체 면적(面積)은 80,928㎡로 대단히 넓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6호로 지정(指定)되었는데 황룡사(皇龍寺)는 왕명(王命)으로 553년 신라 진흥왕(新羅 眞興王) 14년에 창건(創建)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殿堂)들을 완성(完成)되었으며 금당(金堂)은 584년인 진평왕(眞平王) 6년에 완성(完成)되었고 645년인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에 탑(塔)의 건조(建造)까지 92년에 걸쳐 모두 완성(完成)된 황룡사(皇龍寺)는 신라(新羅) 호국신앙(護國信仰)의 중심지였는데 신라 멸망 후(後) 고려왕조(高麗王朝)에서도 숭상(崇尙)하고 보호(保護)했다.
황용사 구층목탑지(皇龍寺 九層木塔址)는 구황동 346-1번지이다. 높이가 80m로 주변(周邊) 아홉 나라의 오랑캐 침략(侵略)으로부터 신라(新羅)를 수호(守護)하기 위한 염원(念願)을 담아 지은 탑(塔)으로 바닥면적(面積)도 한 면(面)의 길이가 22m가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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