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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 황성신문 | 황룡사 역사문화관(皇龍寺 歷史文化館)은 구황동 786-1번지에 있다. 황룡사지(皇龍寺址) 바로 옆에 지어서 연구(硏究)와 발굴(發掘) 및 조사과정(助詞過程)의 성과(成果)를 홍보(弘報)하기 위해 건립(建立)했다. 황룡사(皇龍寺) 창건(創建)부터 소멸(消滅)될 때 까지의 역사(歷史)를 재조명(再照明)한 3D 영상 시청각실(映像 視聽覺室)과 출토된 유물을 전시(展示)한 신라역사전시실(新羅歷史展示室) 등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皇龍寺 九層木塔)을 10분의 1 크기로 만들어 전시(展示)하고 있으며 황룡사지(皇龍寺址) 전경(全景)이 한눈에 보이는 로비 카페(a lobby cafe)도 있어 관광객(觀光客)에게 휴식처(休息處)를 제공(提供)하고 있다.
황룡사지(皇龍寺址) 남쪽 편 미탄사지(味呑寺址)는 경주시 구황동 441번지 일대(一帶)로 들판 가운데 있는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절터인데 정확한 창건 연대(創建 年代)나 조성 경위(造成 經緯)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고려(高麗) 때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미 고허(古墟:오래된 폐허)로 된 기록(記錄)이 있어서 그전에 이미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1980년 6월 삼층석탑(三層石塔)을 복원(復元)하려고 발굴했는데 발굴 조사과정(發掘 助詞過程)에서 미탄(味呑)이라고 쓴 명문(銘文) 기왓조각이 출토(出土)되어서 왕경(王京)의 중심지에 있는 중요(重要)한 사찰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있는 미탄사(味呑寺)로 확인(確認)되었으며 미탄사지 삼층석탑(味呑寺地 三層石塔)은 2017년 1월 11일 보물 제1928호로 지정(指定)하였다. 이때 이곳에서 도침편(陶枕片)과 석제 불두(石製佛頭), 그리고 석탑 상륜부편(石塔相輪部片) 등이 나왔고 탑 기단부(塔 基壇部)에서 소 금동불입상(小 金銅佛立像)과 수정제 장식(水晶製裝飾), 그리고 금동제 영락(金銅製瓔珞)과 흙으로 구워 만든 벼루편 등이 나왔다.
구황동 394-1번지는 전 모전석탑지(傳 模甎石塔址)이다. 중국(中國) 벽돌탑을 본떠 만든 분황사탑(焚黃寺塔)과 같은 것으로 다 허물어지고 남과 북의 감실(龕室) 돌기둥 두 쌍만 남아있다. 탑(塔)을 건조(建造)할 때는 한 변의 길이가 4.5m 정도(程度)의 옥신석(屋身石)으로 제작(製作)하였고 사면(四面)에는 한 면마다 각각의 감실(龕室)을 만들어서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推定)한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뛰어난 조각기법(彫刻技法)으로 돌기둥에 인왕상(仁王像)을 조각(彫刻)했는데 한 쌍은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의 고분관(古墳館) 입구로 옮겨 세워두었다.
전 모전석탑지(傳 模甎石塔址)인 이곳이 신라의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46 ~ 875)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전 도림사지(傳 道林寺址)라고 추정(推定)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전 도림사(傳 道林寺)라는 근거(根據)는 1927년 가을에 일본인(日本人) 학자 오오사카 긴따로(大阪銀太郎)가 현재 탑지(塔址)의 동북쪽 측근(側近)에서 도림(道林)이라 양각(陽刻)된 기와 편이 발견(發見)되었다는 기록(記錄)에 의한 것이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48대 경문왕(景文王)에 관한 이야기에 따르면 도림사(道林寺)의 위치(位置)는 옛날 왕도(王都)로 들어오는 입구(入口)에 있는 숲 근처에 있다고 했고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태종 춘추공 조(太宗 春秋公 朝)에는 도림(道林)의 남쪽에 성부산(星浮山)이 있다고 한다. 성부산(星浮山)은 해발 321.5㎡인 내남면 화곡리 산226, 내남면 화곡리 산237번지 등의 산인데 그 북쪽은 내남면 망성리 아니면 율동 하염불지 방목골 일대이거나 도초(道草) 일대일 것이나 도초(道草)와 도림(道林)이 같은 뜻이므로 율동의 도초(道草) 마을이 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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