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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해수 | | ⓒ 황성신문 | 보광전(普光殿)에는 국보 제29호로 높이가 3.45m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이 있는데 구리가 5,360근이나 들었으며 이 불상(佛像)의 좌대(座臺)는 경내(境內)에 있던 석제(石製)를 옮겨와서 사용한 것 같다.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있어 신화(神畵)라고 불렀으며 탱화(幀畫)로 모신 천수대비(千手大悲)도 있었는데 매우 영험(靈驗)하여 맹인(盲人)인 여자아이가 노래를 불러 간절히 비니까 눈을 떴다고도 전해 온다.
구황동 315-2번지의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는 유일하게 귀부(龜趺)를 사이에 끼고 있기 때문에 보물(寶物)로 지정(指定)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甎石塔)은 국보 30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傑作品)으로 중국의 전탑(塼塔)을 모방(模倣)하였으나 벽돌을 찍어 만든 중국의 전탑(塼塔)과는 달리 회흑색(灰黑色) 안산암(安山岩)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았다. 분황사(芬皇寺) 창건과 함께 만들어 세워진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으며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 의하면 건립(建立)할 때는 9층이라고 했으나 7층이었다는 주장(主張)도 있어 몇 층이었는지는 불확실(不確實)하나 3층만 남아있다. 1915년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때 개축하여 복원(復元)한 것으로 탑(塔) 안에서 사리함(舍利函)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遺物)이 쏟아져 나왔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指定)되었다.
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은 구황동 314-5번지 분황사(芬皇寺) 경내(境內)에 있는 돌우물이며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 제9호로 지정(指定)하였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일 수 있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파서 돌을 쌓았는데 지면(地面) 위쪽은 팔각이고 지하(地下) 안쪽은 둥근 원통형(圓筒形)이다.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하는데 분황사(芬皇寺)와 금학산(金鶴山) 기슭에 있는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우물에는 각각 호국룡(護國龍)이 살고 있었다. 795년 신라(新羅) 제38대 원성왕(元聖王) 11년에 중국 당나라 사신(使臣)이 이 용(龍)들을 물고기로 변신(變身)시켜 잡아 가져가므로 이를 본 두 여인이 왕(王)에게 아뢰었다.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왕(王)은 각각의 우물에 넣어주었고 한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優秀)하며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양호(良好)하다.
이 밖에도 경북 유형문화유산 97호인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석조(石槽), 초석(礎石), 석등, 대석(臺石)과 사경(寺境) 등이 경내(境內)에 있다.
구황동 원지 유적(九黃洞 園池 遺蹟)은 구황동 297번지에 있는 신라(新羅)의 유적(遺跡)으로 2019년 2월 26일 사적 제549호로 지정(指定)되었다. 원지(園池)는 중심부(中心部)에 크고 작은 인공섬이 두 개가 있고 그 주위에 입수로와 배수로(排水路), 건물지와 담장, 축대(築臺) 등이 조화(調和)를 잘 이루고 있는데 동궁(東宮)과 월지궁(月池宮), 그리고 용강동 원지(園池)에 이어서 조성연대(造成年代)와 규모(規模), 그리고 내부구조 등이 자세(仔細)히 규명(糾明)된 세 번째 신라왕경 원지(園池) 유적으로 희소성(稀少性)도 있다.
구황동 383-7번지에는 남씨 창열각(南氏 彰烈閣)이 있는데 6·25 동란(動亂) 때에 북한 인민군의 공격(攻擊)으로 총상(銃傷)을 입어 죽음의 문턱에 이른 남편 이진우(李珍雨)를 자신의 피부(皮膚)를 잘라 이식(移植)하여 남편을 회생(回生)시킨 열녀 남씨(烈女 南氏)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碑閣)이다.
신라왕경(新羅王京)숲은 신라시대(新羅時代) 왕경에 하천 범람(氾濫)을 대비(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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