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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동(仁旺洞)일대는 사로6촌(斯盧六村)중 정지백호 (鄭智伯虎)의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이였다.(8)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6년 05월 22일(금)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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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해수 |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맨 꼭대기에는 우물정(井) 자 모양(模樣)인데 높이30㎝와 2.5m의 길이 돌을 2단으로 포개어 놓았다. 29층이며 1934년에 국보(國寶) 로 지정(指定)되었는데 국보 제31호이고 동양(東洋)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7세기 중반에 건립(建立)하였지만 지금까지 단한 번도 보수(補修)나 개축(改築)했다는 기록이 없어서 특이(特異)하다. 고대(古代) 구축물(構築物) 중에 유일하게 원형(原形) 그대로 존재(存在)하고 있음이 첨성대(瞻星臺)의 특별한 의미(意味)가 아닐까 한다. 3층 정도의 건물(建物) 높이에 이르는 첨성대(瞻星臺)는 돌의 개수가 음력(陰曆)으로 일 년을 뜻하고 27개 단은 신라 27대 선덕 여왕(善德女王)을 상징(象徵)한다고 한다. 비두거리 또는 비둣거리는 월성(月城) 북쪽의 첨성대(瞻星臺) 주변의 마을과 앞의 길을 말하나 역시 첨성대(瞻星臺) 주변 정비사 업(整備事業) 때 없어졌으며 첨성대(瞻星臺) 서쪽에도 각종 상례(喪禮)에 사용하던 깃발을 보관(保管)하던 곳인 독재단의 터가있었다. 첨성대(瞻星臺) 북쪽 인왕동 816번지에 제 27호 고분(古墳)이 있고 고분(古墳) 앞 인왕동 817-1번지에 문호사(汶湖社)와 정효각(旌 孝閣) 그리고 창의비(倡義碑)가 있는데 1750 년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26년에 중건(重 建)된 4칸 기와집으로 충효동(忠孝洞)에 있었던 건물(建物)을 이곳으로 이축(移築)하였다고 한다. 문호사(汶湖社)는 조선중기(朝鮮中期) (1515~1599) 때 성리학자 관란(觀瀾) 이승증 (李承曾)의 충효정신(忠孝精神)을 받들어 배향(配享)하는 서원(書院)이다. 효행(孝行)을 기리는 정효각(旌孝閣)과 의병활동(義兵活動)을 기리는 창의비(倡義碑) 인데 1542년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37년에 보문보(普門洑)를 막아서 한발(旱魃)에 대비 (對備) 하기도 했다. 1592년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25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노령(老齡)인 78세에 경산 자인(慶山 慈仁)에서 최동보(崔 東輔)와 최여호(崔汝琥) 등과 함께 의병(義 兵)을 일으켜 적(敵)을 섬멸(殲滅)했다. 모친상(母親喪)을 입어서는 3년 동안 시묘 (侍墓)살이를 했는데 매일 절을 한자리가 한자(尺)가 파였으며 호랑이도 감동(感動)하여 짐승을 잡아다 산소(山所) 앞에 두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관찰사(觀察使)가 효행(孝行)을 조정(朝廷)에 알려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시묘(侍墓)살이한 산기슭에 있던 효행(孝行) 에 감탄(感歎)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충효동(忠孝洞)이라 했다고 한다.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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