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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명실(明室)은 명곡(明谷), 소명곡(小明谷)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중기 때 선비인 남재황(南載黃)이라는 사람이 이 동내의 계곡(溪谷)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아침부터 온종일 햇볕이 잘 비추는 곳이라 하여 명곡(明谷)이라고 하였다는 설(說)과 촛대와 같이 생긴 화봉괘정산(火峰掛灯山)에 불을 놓으면 괘정산(掛灯山) 후면(後面)은 어두워 암곡(暗谷)이라 하고 전면(前面)은 밝아서 명실(明室)이라 했다고 하는데 마을 거의가 덕동호(德洞湖)에 수몰(水沒)되고 산 위에 일부(一部)만 남아있다. 수몰(水沒)되고 남은 수면(水面)에서 높이 약 260m 정도(程度)의 경주시 덕동 산164-1번지인 괘정산(掛灯山)정상으로 신평동(新坪洞)과 경계(境界)이며 북(北)쪽으로는 암곡(暗谷)과 경계(境界)를 이루고 있다. 명실(明室)마을에서 암곡동(暗谷洞)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境界地點)에 나비처럼 생겼다고 하는 나부재가 있다. 동(東)쪽에는 벼락을 맞은 바위도 있어 이 골짜기를 베락골이라고 하며 베락 골목재는 베락골이 있는 고개를 말하는데 이곳으로 하여 황룡동(黃龍洞) 절골로 넘어 다니던 소롯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부(一部)가 수몰(水沒)되었다.
소유정(小有亭)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규일(李圭一)이라는 선비가 건립(建立)한 정자(亭子)로 마을 앞에 있다.
치암(痴庵) 남경의(南景羲,1748~1812)의 명곡동안기(明谷洞案記)에 따르면 “1700년 후반(後半)에 영양남씨(英陽南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마을을 개척(開拓)했다고 하며 명실(明室) 북(北)쪽 시내를 따라 서(西)쪽으로 꺾으면 십여 장의 병풍(屛風)바위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 거북 형상의 바위를 볼 수 있고, 북(北)쪽에 최공(崔公)의 정자(亭子) 아래에 이르면 깊은 못과 너럭바위가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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