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동안 이어진 제 야구 인생을 경주에서 마무리하면서 제가 배운 야구의 모든 것을 어린 후배 양성을 위해 쏟아붓고 싶다”...이선희가 왔다. 삼성라이온즈에서 프로야구 원년을 휩쓸었던 이선희 감독이 경주고등학교 야구 감독으로 부임했다. 야구에 관심 있는 50대 중반 이상이라면 모두가 전설의 이선희 감독을 기억할 것이다. 경리단 시절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 전무후무한 ‘노히트 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한 전설이 경주고 야구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따라서 지난 1989년과 92년, 2003년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경주고 야구가 이선희 감독의 부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야구공을 잡은 이선희 감독은 그길로 55년의 야구 인생을 걸었다. 그 마지막을 경주고등학교에서 마감하겠다고 한다.
그는 인성과 야구, 학업의 3박자를 두루 갖춘 야구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야구 실력과 함께 인성과 지성을 겸비한 차별화된 경주고 야구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 감독은 국가대표 시절 일본 킬러로 통했다. 그의 왼손에서 뿌려지는 강속구는 극일의 첨병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일본야구는 이선희 이름 석자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생각이 난다. 이선희는 의리의 사나이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꿈꿨다고 한다. 실제 몇몇 야구명문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양보한 것은 아직도 대한민국 야구계에 미담으로 남아있다.
고교를 졸업한 이 감독은 실업팀인 농협 야구단에 들어가 대한민국 최고의 좌완 투수로 명성을 날리다 입단 1년 차에 올스타로 선발됐다. 또 2년 차에 국가대표에 선발돼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임을 입증했다. 또 1978년에는 실업리그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는 프로야구가 창단되지 않은 시절이다. 그런 전설의 이선희가 경주고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 감독 부임으로 경주고 야구에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경주고는 지난 1958년 야구부를 창단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60년 해체됐다가 1982년 재창단 됐다. 이후 89년과 2003년 대통령배 야구대회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1992년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4강에 오르는 등 야구 명문고로 자리매김 했다.
특히 걸출한 국가대표도 여럿 배출했다. 하일, 김설권, 김충 등이 그들이다. 이 감독은 그의 야구 철학을 야구와 인성, 학업으로 정리한다. 그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빨라 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선희만의 색깔 있는 야구가 경주고 야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기대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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