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낭산(狼山)은 경주시 배반동과 구황동, 보문동의 3동네를 경계로 하며 누에가 길게 기어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으로 남산(南山)을 잘못 표기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낭산(狼山)의 남쪽과 서쪽은 배반동인데, 본래는 양성하다는 뜻의 북을 돋울 배(培)자를 쓴 배반(培盤)이었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밀칠 배(排)자를 써서 배반(排盤)으로 표기하다가 1995년 본래의 이름인 배반(培盤)으로 환원되었다. 배반동의 남쪽 산과 서쪽 산, 보문동의 서편 산 정상(頂上)으로 해발 100여 m에 이르는 이리가 엎드려 있는 형상(形狀)이라고 해서 이리 낭(狼)자의 낭산(狼山)이라 했다고 하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고 하여 왕궁, 즉 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서 낭산(狼山)이라 했다고도 한다.
413년(실성왕 12) 8월 어느 날 낭산(狼山)에서 갑자기 뭉게구름이 피어났다. 형상이 누각(樓閣)처럼 보였고 향기로운 내음새가 온누리에 풍겼다. 그것을 본 실성왕이 지금 신선(神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고 있으므로 복(福) 받은 땅이라고 하면서 낭산(狼山)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훼손(毁損)하는 것도 금지(禁止)하였으므로 오늘날 국립공원이나 그린벨트(greenbelt), 즉 개발제한지역(開發制限區域) 지정의 원조(元祖)가 된 셈이다. 그 훗날 7세기 말에 고승인 명랑법사가 신(神)들이 노니는 숲이라 이름하여 신유림(神遊林)이라 불렀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이 있었는데 이 3산 가운데 왕경에 속한 유일한‘나력’을 ‘낭산(狼山)’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기근(飢饉)이나 질병에서 나날의 삶들이 힘들었던 신라의 민초(民草)들이 찾아와 안식(安息)을 찾고 치유하려 했던 곳이 낭산(狼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도 경주시 보문동 987번지(경주시 하강선길 43-32) 일대를 선녀(仙女)들이 하강(下降)했다는 하강선(下降仙)마을 또는 하강시이마을이라고 하며 경주시 보문동 953번지(경주시 상강선길48-4) 일대를 선녀(仙女)들이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상강선(上降仙)마을, 상강시이마을이 있다.
김유신 장군이 18살 되던 해에 고구려 첩자(諜者)인 백석의 꼬임에 속아서 죽을 위기가 닥친 적이 있었는데 나림(나력 즉 낭산)과 안강의 혈례(穴禮)와 영천의 골화(骨火), 3산의 신인(神人)인 세 낭자가 김유신을 구해 주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서 벗어난 후 재물(齋物)을 차려 정성을 다해 제사(祭祀)를 올리니 낭산(狼山)과 혈례(穴禮), 골화(骨火)의 3신(三神)이 흡족(洽足)하게 제사상(祭祀床)을 받았으므로 낭산(狼山)은 국가 수호신인 여신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선덕여왕은 어느 날 문득 정미년(丁未年), 즉, 647년 1월 8일이면 자신이 죽는다고 하면서 “647년 1월 8일 죽으면 낭산(狼山)의 남쪽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라고 당부(當付)했다. 선덕여왕 16년, 진덕여왕 원년, 즉 정미년(丁未年) 1월 8일 정확하게 승하(昇遐)하자 신하들은 선덕여왕이 살아생전 원하던 곳인 경주시 배반동 산 32번지와 경주시 보문동 산 79-2번지의 정상(頂上)의 경계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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