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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동(坪洞)은 문천(汶川)거랑가의 들판마을이다. (2)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3년 09월 01일(금)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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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지난호에 이어 사리(士里)마을은 보통 수북(水北)과 수남(水南)마을을 지나 평동교(坪洞橋)를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서쪽 편 남산자락 아래에 반달을 닮았다는 성스러운 반월산과 새알 모양으로 생긴 얄미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하고 포근한 마을이다. 정공청(鄭公淸)이라는 무관(武官)이 1563년(조선조 명종 18년) 평동(坪洞) 158(사리士里)에서 출생했다. 선조(宣祖) 34년(1601)에 무과인 식년시(式年試)의 병과(丙科)에 합격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애국자(愛國者)이다. 경주안강과 울산서생포와 동래웅천, 부산다대포 전투 등에서도 왜군(倭軍)과 용감히 싸워 전공(戰功)을 많이 세웠다. 당시 의병장(義兵將)시절에 사용하던 투구며 갑옷, 장갑과 혁대, 그리고 화살 등의 유품(遺品)이 국가민속문화재(國家民俗文化財) 38호 등으로 지정(指定)되어 울산박물관{울산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이며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시조인 정지백호(鄭智白虎)의 탄강(誕降)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후손(後孫)들이 만들어 세운 비(碑)가 마을 앞의 반월산(半月山) 중턱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시조의 본향(本鄕)도 경주사리(慶州士里)마을이다. 그런데 왜 사리정씨(士里鄭氏)라고는 하지 않을까? 이 마을은 수많은 선비가 이 동내(洞內)에서 탄생(誕生)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 무렵에 촌락(村落)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경주정씨(慶州鄭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했으며 뒤를 이어 성주도씨(星州都氏), 해주오씨(海州吳氏) 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동(坪洞) 242의 사리(士里)못은 남산 기슭에 있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저수지(貯水池)이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이 못뚝에서 새우며 개구리, 잠자리를 잡던 추억(追憶)이 서린 곳일 것이다. 마을 서북쪽 산에는 부엉이가 사는 집이 있었다는 부엉이 골짜기가 있으며 사리(士里) 남쪽에는 내남면 노곡리의 오가리로 넘어가는 어가릿재도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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