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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 황성신문 | 덕봉이진택(德峯李鎭宅)은 1780년 조선시대(朝鮮時代) 정조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역임했으며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그리고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등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다. 사헌부(司憲府)의 정사품(正四品) 관직으로 정원(定員) 2명 중 1명인 감찰(監察) 업무를 담당(擔當)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끝으로 고향에 내려온 덕봉이진택(德峯李鎭宅)(1738∼1805)이라는 사람이 죽을 때 까지 말년(末年)을 보내려고 집을 지어 후진(後進)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마(鍊磨)했다.
덕봉이진택(德峯李鎭宅)은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 중 청렴(淸廉)하고 강직(剛直)하여 시류(時流)에 영합(迎合)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는 굽히지 않고 직언(直言)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직무(職務)가 막중(莫重)한 요직(要職)을 두루 맡아서 이조(吏曹)의 전랑(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支撐)하는 역할(役割)을 하였다고 한다.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을 책임져야 한다며 부관참시(剖棺斬屍)할 것을 주장(主張)하기도 했고 1793년 대간(臺諫)으로 근무(勤務)할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主張)하는 상소(上疏)를 올리는 등 사노비개혁론(寺奴婢改革論)을 주장(主張)한 결과(結果) 1801년인 순조 1년에 나라의 공노비(公奴婢) 전부를 해방(解放)시켜서 다른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미국(美國)의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大統領)처럼 큰일을 했었다. 저서(著書)로는 덕봉문집(德峯文集)이 있다.
광무(光武) 9년인 1905년에 그의 증손(曾孫)인 이우영(李祐榮)이가 그를 추모(追慕)하기 위해 말년을 보낸 집터에 사당(祠堂)을 세워서 증조부(曾祖父)의 호(號)를 따서 덕봉정사(德峯亭舍)라는 현판을 걸었다.
덕봉정사(德峯亭舍)가 있다고 하여 이 일대(一帶)를 정자동(亭子洞)과 정자(亭子)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덕봉이진택(德峯李鎭宅)의 후손(後孫)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집성촌(集姓村)으로 종가댁(宗家宅)도 있다.
별신(別神)굿을 하던 들판을 배신당들이라고 했는데 정자마을의 남쪽(亭子)에 있는 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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