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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산성과 주변 마을 이야기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3년 03월 17일(금) 15:02
↑↑ 가장존 공인중개사 사무소 대표 행정학 박사 윤 해 수
ⓒ 황성신문
명활산(明活山)은 경주시 보문동에서 천군동에 걸쳐져 있는 높이가 245m인 나지막한 산이지만 신라는 이 산이 신령(神靈)스러운 산이어서 해마다 입춘이면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진한(辰韓) 사로국(斯盧國) 6촌장 중 2명이 명활산(明活山)에서 탄강(誕降)했거나 살았다. 배씨(裵氏)의 시조 배지타(裵祗沱)가 명활산(明活山)에서 탄강(誕降)하여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이 되었고, 설호진(薛虎珍)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시조로 금강산에서 탄강(誕降) 했으나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옮겨와서 촌장(村長)이 되었다.
이 산 중턱의 명활산성(明活山城)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의 신라 때에 축성되어 왕경(王京)을 방어하였던 성곽(城廓)으로 산성이다.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은 960,000㎡로 1963년에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었다. 실성왕(實聖王) 4년(405년 4월)에 왜군이 명활성(明活城)을 침공(侵攻)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405년 이전에 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보면 신라 초기의 방식(方式)이다.
473년(자비왕 16년) 7월에 이 산성을 개수(改修)하고 475년 정월에 이 성(城)으로 옮겨 거주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554년(진흥왕 15년)에 다시 개축(改築)하였을 때의 둘레가 1,906보이며, 593년(진평왕 15)의 개축(改築)하였을 시는 3,000보 였다고 한다. 지금 이 성(城)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남아 있는 곳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때 개축(改築)한 성(城)인 것으로 추측(推測)하고 있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국방요새(國防要塞) 였으며 신라는 역사 이전부터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 골 머리가 아팠다. 왜구들은 왕경(王京)으로 들어가기 위해 동해안을 지나 대종천(大鍾川)을 따라 깊숙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는 관해동(추령고개)으로 침투하여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 대접전(大接戰)을 치루 었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왜구들과의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의 전투가 수없이 이루어졌다는 기록(記錄)이 있다. 심지어 475년(자비왕18년)부터 488년(소지왕10년)까지 13년 동안 왕이 이곳에 기거(寄居)하면서 왜구의 침략을 봉쇄(封鎖)했다고 한다.
아무튼 신라시대에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중심으로 보문단지가 왜구들과의 격전지(激戰地)인 최전방(最前方)이었던 것 같다.
천군동(千軍洞)은 신라 자비왕(慈悲王)때 일천 명의 특수부대(特殊部隊)를 주둔시켜서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이 없는 평상시에는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전쟁이 나면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 싸우고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교란시겨서 섬멸(殲滅)시켰다고 하며 일천 명의 군대가 주둔했던 마을이라고 하여서 일천천(千), 무리군(軍), 천군동(千軍洞)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군동(千軍洞)에는 자연부락으로 피막(避幕)골, 청단(靑壇)마을, 아동(牙洞)마을, 갱빈(강변)마을, 돌미기각단, 못밑각단, 본동(本洞), 솔미기마을, 양장(羊場)마을(양골), 어븐골, 윗마을, 아랫마을, 신평(新坪)마을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안동 권씨가 피난을 와서 막(幕)을 치고 살았다는 피막(避幕)골, 또는 필막과 숲이 울창하여 푸른 마을이라는 뜻의 청단(靑壇)마을, 산의 형국이 어금니 이빨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아동(牙洞)마을은 1651년(효종 2년) 김자점의 역적모의를 했다는 상소(上疏)로 김자점의 일파가 완전히 숙청(肅淸) 당하였을 때 김여척이라는 사람이 피신하여 숨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갱빈(강변)마을은 지금의 경주월드 인근의 갱빈(강변)에 있던 마을이다. 돌목마을은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튀어나와서 병목처럼 생긴 마을로 돌미기각단이라고도 했다. 못밑각단은 풍등지(豐登池) 아랫마을을 말하며 이 풍등지(豐登池)는 못의 물이 많거나 적은 것을 보고 그 해의 농사가 풍년(豐年)이 들 것인지 흉년(凶年)이 될 것인지를 점(占)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큰 마을은 본동(本洞)이라고도 하는데 천군동(千軍洞) 본래의 마을이며 천군쌍탑(千軍雙塔)이라고도 불리는 천군리삼층석탑(千軍里層塔三)이 있는데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탑이라고 추정한다.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은 알 수가 없으나 1935년 경에는 현각사(玄閣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1938년 5월 문화재로 지정하여 현제 보물 제168호로 지정되었고 1939년에 탑의 주위를 발굴 조사하여 강당지(講堂址), 금당지(金堂址)의 터를 확인하였다.
천군동(千軍洞)의 동쪽에 양쪽으로 높은 산이 있어서 지형이 병목처럼 생긴 솔미기마을이 있었고 양장(羊場)마을은 양을 기르던 목장으로 도립축산시험장(道立畜産試驗場)이 있어서 산양과 면양을 길렀다고 하는데 50 ~ 60년대에 여자아이가 울면 양골 얌생이(염소)에게 시집보낸다고 겁을 주기도 했는데 이 양장(羊場)마을을 양골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어븐골은 숲이 울창한 가운데 있는 마을로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서 어두웠다고 하며 아동마을의 동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똥골마을은 행인(行人)들이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없는 마을 뒤 골짜기에서 볼일을 보는 일이 잦다고 하여서 붙혀진 이름이며 천군동(千軍洞)에서 하동(鰕洞)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있던 마을이다. 신평(新坪)마을은 보문관광단지(普門觀光團地)를 만들 때 이주(移住)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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